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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 (블라바츠키, 포웰)

멘탈체 [멘탈체] 10.무의식적인 상념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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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4,481회 작성일 16-07-31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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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장 

무의식적인 상념전이 




제 7장과 8장에서 우리는 상념파동들 및 상념체의 생성과,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느 정도 다루었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후자적인 측면―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욱 상세히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완전히 일어나든 아니면 부분적으로 일어나든 무의식적인 형태의 상념전이를 다룰 것이다. 

이미 이야기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상념의 자취를 뒤에 남긴다. 예를 들면, 우리가 거리를 따라서 쭉 걸어갈 때 항상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상념의 바다 속에서 걷고 있다; 대기大氣 전체가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은 타인의 상념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이 마음을 잠깐 동안 텅 비워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상념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마음에 아주 작은 인상을 줄 뿐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때때로 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상념이 마음속에 들어와 그의 마음이 그 상념을 붙잡아서 잠시 동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그 상념에 힘을 불어넣음으로써 강화한 다음에 다시 그 상념을 내보내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상념에 대한 책임은 없다. 왜냐하면 그 상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 상념을 취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난 후에 강화시킨 채로 내보내면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많은 근원들로부터 오는 그런 혼합된 상념들은 어떠한 명확한 일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상념들 중 어떠한 것이라도 일련의 연관된 생각들을 일으켜 마음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상념들의 흐름을 조사한다면, 아무런 근거도 없고, 쓸모도 없는 공상들이 짧은 기간 중에 얼마나 많이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떠나는 지를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이 상념들 중 4분의 1도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 상념들은 전혀 쓸모가 없고, 그들의 일반적인 성향은 좋기보다는 오히려 나쁘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주로 명확한 의도 없이 내보내어지는 그들의 상념에 의해 계속해서 서로서로 영향을 미친다. 사실, 여론與論은 주로 이렇게 해서 형성된다. 대부분의 여론은 상념전이想念轉移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그 문제를 생각해 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설득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힘이 강한 사고자思考者의 강력한 상념은 멘탈계 속으로 들어가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포착된다. 그들은 포착한 그 진동을 재현하고, 상념을 강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상념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결국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상념체들을 전체적으로 고찰한다면, 그들이 민족적 및 인종적인 감정을 일으켜 마음에 편견을 갖게 하고,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는데 끼치는 엄청난 영향을 깨닫기가 쉽다. 우리는 어떤 생각들 가령 민족적인 편견들, 여러가지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의 사고방식들, 그리고 상념과 감정의 민족적인 여러 형태들을 구체화하는 상념체들로 붐비는 대기―상념의 바다―에 둘러싸인 채로 성장한다. 이런 모든 상념들은 우리의 출생부터 심지어 출생 이전부터 우리에게 작용한다. 모든 것을 상념의 바다인 이 대기를 통해 보고, 모든 상념은 이 대기에 의해 다소간 굴절이 되고, 우리 자신의 멘탈체와 아스트럴체는 이 대기와 일치해서 진동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국가적인 분위기에 의해 지배된다. “여론與論”은 일단 형성되면, 쉴새 없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두뇌를 강타하고 그 두뇌 속에 공명하는 진동들을 일으키면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자나 깨나 이러한 영향들은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으며 바로 우리의 무의식이 그것들을 더욱 효과 있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격상 솔선해서 하기보다는 수용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이르는 상념들을 거의 자동적으로 재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전국적인 분위기는 계속적으로 강화된다. 

이러한 사태의 필연적인 결과로 다른 국가들로부터 인상들을 받는 나라들은 자기 나라의 진동율로써 그 인상들을 수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똑같은 사실들을 볼 때, 다른 국가의 국민들은 그 사실들에다 자신들이 자지고 있는 현재의 선입관들을 더해 놓고는 서로서로가 그 사실들을 왜곡하고 부정한 방법들을 실행하고 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과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인식된다면, 많은 국제 분쟁들이 현재의 경우보다 더 쉽고 순조롭게 해결되고 많은 전쟁들까지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각 국가는 “각국의 개성의 차이에 의한 판단의 차이”를 인식하고 의견차이에 대해 상대방을 비난하는 대신에, 두 견해 사이에 절충을 구하고 나아가 어느 당사자도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론을 형성하는 거대한 구름떼 같은 상념체들의 영향을 뿌리치고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힘으로 (진리와 사실에 대해서) 진정한 구별을 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 진실을 전혀 볼 수 없으며, 또한 그 존재에 관하여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이 거대한 상념체를 받아들이는데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에게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명확하고 편견 없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다른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명확한 시야를 확실히 견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거대한 덩어리로 떠도는 상념의 구름이 미치는 영향력을 간파한다는 것은, 그 영향력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념의 영향력은 언제까지나 존재하고 있으며, 비록 우리가 보다 큰 사항에 대해서는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할지라도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굴복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압氣壓의 영향하에 태어나는 것과 똑같이 상념의 구름의 영향 하에서 태어났고, 기압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이 그 영향력을 의식하지 못한다. 신비주의자는 자기자신을 이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이러한 거대한 집단적인 상념체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채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만 한다. 

집단 상념체들의 영향은 사람의 정묘한 체들에 미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훨씬 범위를 넘어서서 작용하고 있다. 파괴적인 유형의 상념체들은 파괴적인 힘(에너지)으로 작용하여 종종 물질계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들은 수많은 “사고”를 일으키는 근원, 즉 자연의 이변들, 폭풍, 회오리바람, 지진, 홍수 등의 근원이다. 

그것들은 전쟁과 혁명 그리고 모든 종류의 사회적 혼란과 격동을 야기시킬 지도 모른다. 질병 및 범죄의 유행, 사건들의 주기적인 발생들은 마찬가지로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분노의 상념체들은 살인을 저지르는데 일조한다. 이리하여 모든 방향으로 끝없는 형태들로써, 사람들의 악한 상념들은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반작용하면서 파괴를 자행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개인의 상념이 유발하는 결과들에 주의를 기울일 때, 학도는 “아스트럴체”에서 헌신적인 감정이 물밀듯이 들어옴으로써 아스트럴체에 생기는 결과들에 대해 설명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한 헌신적인 감정은 대개 헌신의 상념들에 의해 또한 수반된다. 이러한 상념들은 주로 멘탈체에서 형성되지만 그 주위에 아주 많은 아스트럴 질료를 끌어당겨서 멘탈계와 아스트럴계 양쪽 모두에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발달한 사람은, 헌신적인 상념파동이 퍼져나가는 중심지인데 필연적으로 상념과 감정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애정, 분노, 의기소침 그리고 다른 모든 감정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하나의 전형적인 예는 강사로부터 흘러나오는 상념흐름들과, 청중으로부터 일어나서 그에 결합하는 올바른 이해와 인식의 상념흐름들이 바로 그 예이다. 

종종 강사의 상념들이 작용하여 청중의 멘탈체들에 공명진동하는 반응이 일어나서 그 순간 그들은 강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강사의 자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는 잊어버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당시에는 명료한 것처럼 보였던 것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한편, 비평적인 상념은 강사의 상념 흐름을 깨뜨리고 혼란시키면서 상반되는 진동율을 일으킨다. 이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본 사람은 누구든지 그 실습 수업object-lesson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해진다. 

어떤 책을 읽을 때 사람의 상념은 살아있지만 수면 중이거나 죽었지만 아스트럴체에 있을지도 모르는, 저자의 주의를 끌 수도 있다. 이리하여 저자는 학생에게 끌려와서 학생으로 하여금, 저자가 (학생의) 육체를 입고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작가의 분위기에 아주 강하게 휩싸이게 할 수도 있다. 

역시 유사하게, 학생의 상념은 같은 주제를 연구해온 다른 사람들의 상념을 자기에게로 끌어 들일 수도 있다. 

사자死者의 상념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뛰어난 예는, 어떤 사람이 가령 살인죄로 처형을 당한 곳에서 그가 다른 살인을 선동함으로서 보복을 하는 곳에 일어난다. 사실 이것은 공동사회에서 때때로 그와 똑같은 유형의 살인들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된다. 

어린아이에게 미치는 상념의 영향은 특히 두드러진다. 어린아이의 신체가 유연하고 형성력形成力이 있는 것과 같이 그의 아스트럴체와 멘탈체도 똑같다. 어린아이의 멘탈체는 스폰지가 물을 빨아올리듯이 다른 사람들의 상념들을 흡수해버린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지금은 그 상념들을 재현을 못 할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에 뿌려진 상념의 씨앗들은 적절한 시기에 재현하게 된다(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가 고상하고 사심 없는 분위기에 둘러싸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투시가透視家에게 어린아이의 아름답고 순백한 영혼과 오라들이 몇 년 지나서 주위에 있는 어른들의 이기적이고, 순수하지 못하며, 거룩하지 않은 상념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때가 묻고, 어두워지는 것을 본다는 것은 끔찍하다. 단지 투시가만이, 어른의 인격이 더 좋기만 한다면 어린아이의 인격이 얼마나 엄청나게 그리고 얼마나 빨리 향상될 것인지를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상념과 의지를 지배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리 좋은 목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상념을 사람의 좋은 특성에 고정시키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좋은 특성들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그의 결점들이나 나쁜 성향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성향들을 강화하거나, 악한 특성들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단지 씨앗으로 잠복해 있던 곳에 악한 특성들을 생기게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를 간단히 들면, 잡담이나 추문에 탐닉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질투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을 가정하자. 이런 사람들이 비난하는 즉시 그 불행한 희생자에게 질투를 연상시키는 온갖 종류의 상념흐름들을 쏟아 붓기 시작한다. 만일 그가 이미 질투하는 성향이 있다면 그러한 상념의 홍수에 의해 크게 강화될 것은 명백하다. 반면에 자신은 전적으로 질투로부터 벗어나 있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그의 결점을 상상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너무나 잔인하게도 아주 고소하게 좋아하는 그 상상된 결점에서 넘어서서 그 사람 속에 바로 악을 창조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잡담과 추문에 의해 가해지는 상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신비학도는 “스승의 발밑에서At the Feet of the Master”에서 이러한 나쁜 짓을 하는 것에 대한 준엄한 꾸지람이 언급되어있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현시대에 행해지는 많은 비평들이 결점을 신랄하게 공격하는데 치중하는 반면, 진실한 신비주의자가 취할 비평의 자세는 ‘기쁘게 진주를 열심히 캐듯이’ 행하는 그러한 비평이 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좋든지 나쁘든지간에 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혹은, 오히려 그 불가피성―으로 인하여, 상념의 힘을 행사하려고 뜻을 품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힘은 무서운 무기가 된다. 

아스트럴-멘탈 영상들 즉 감정이나 느낌이 관련되어 있는 상념체들은, 많은 사람들을 상호간에 카르마적으로 연결시키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이리하여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가슴에 사무치는 증오와 보복의 상념을 내보냄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충동을 일으키는데 일조를 했다고 가정하자. 그 상념을 일으킨 사람은 비록 물질계에서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결코 본 적이 없지만 자신의 카르마Karma에 의해 그 범죄자와 필연적으로 연결이 된다. 비록 모른다고 해서 혹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카르마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육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상념과 감정으로 인해 생기는 그 결과도 그대로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만드는 멘탈 영상들은 그의 미래 환경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식으로 이후의 생애에서, 선하거나 악한 목적으로 사람들을 함께 끌어당기는 인연이 맺어지게 된다. 그 인연으로 인해 우리는 여러 유대관계와 친구와 적들로 둘러싸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행로에서 조력자들 즉 이 생애에서 우리가 사랑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방해자들 즉 이 생애에서 증오를 받을 만한 아무 짓도 행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념들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작용하여, 우리의 멘탈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차후에 우리가 여러 인간관계로 사귀게 되는 친구들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물론, 우리 주위에 오오라의 질료로써 벽을 만들어서 우리 자신을 외부에서 오는 상념체들의 침입으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보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멘탈 질료는 상념의 자극에 아주 쉽사리 반응하고 우리가 원하는 어떠한 모양으로도 쉽게 만들어질 수가 있다. 우리가 “아스트럴체”에서 본 바와 같이, (멘탈 질료로 방어막을 형성하는) 원리가 아스트럴 질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보호막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고백하는 것이고, 모든 것 중 최고의 보호는 강력하게 뿜어져 나오는 사랑의 물결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일소하는 해같이 밝게 빛나는 선의善意와 순수함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보호막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1) 난잡한 군중들 속으로 들어갈 때 
2) 명상시에 
3) 잠들기 전에 
4) 보호막의 도움 없이는 저급한 상념들이 들어올 것 같은 특별한 상황등에 사용될 수 있으며, 2)는 제16장에서; 3)은 제18장에서; 4)는 제13장에서 각각 다루어 질 것이다. 

보호막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는 데 있어 분명히 여러가지 용도가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조력자”는 외부로부터의 명확하고 의도적인 공격들에 대해서나, 지루하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상념들의 소용돌이에 대해서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사람을 돕는데 가끔씩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감정의 세계에 살고 있는 동물들이 감정적인 자극들을 멀리 떨어져 있는 동료들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윌리엄 J. 롱William J. Long은 흥미로운 그의 저서 “How Animals Talk”(어떻게 동물들이 이야기하는가)에서 이러한 텔레파시적인 의사소통 방법이 전 동물계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라고 자신이 믿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수많은 실례가 동물들의 생활에 호의를 가진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이 관찰자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돈Don이라 불리는 세트종種 사냥개는 주인이 언제 집으로 돌아오는 지를―특별히 예기치 않은 때에도―항상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개는 또한 언제 토요일이나 휴일이 돌아오는지 그리고 주인이 언제 그를 숲속으로 데리고 나갈 지를 알고 있었다. 와취Watch라는 개는,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말이 오륜경마차를 운전하면서, 주인과 함께 3~4마일 떨어진 곳에서 집으로 출발하는―항상 달리하는―몇 초의 시간 내에 그의 주인을 만나러 나가는 것이 거듭 관찰되었다. 

두려움이나 초조함이 말을 탄 사람에게서 말에게로 쉽게 전달된다는 것은 말을 타는 사람들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 만일 늑대새끼 한 마리가 새끼들로부터 도망치면, 어미늑대는 그 새끼를 뒤쫓는 대신에 조용히 그대로 남아서 머리를 들어 새끼가 달아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쳐다보면, 새끼는 주춤하다가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그 새끼들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 관찰되었다. 암 여우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매순간 자기의 가족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같다; 어미가 새끼들을 계속 응시하면, 새끼들은 즉시 노는 것을 멈추고 즉시로 굴 속으로 뛰어 들어와서 어미가 사냥가서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상처를 입은 늑대는, 며칠 동안 홀로 누워 있은 후에―물론 전혀 자취가 남아있지 않지만―8~10마일 떨어져 있는, 늑대떼들이 그 당시에 죽였던, 동물의 시체를 향해 곧장 달려간다고 알려져 있다. 

캡틴 룰Captain Rule이라는 사람은 그가 향유고래를 (작살로) 맞히자 마자, 10마일 이내에 있는 모든 다른 향유香油고래가 마치 전부 작살에 맞은 것처럼 꼬리를 돌린다(뒤집는다)는 것을 관찰했다. 어떤 야생동물들은 다른 많은 새들이 열심히 먹이를 먹고 있는 순간에는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찌르기과 새들의 “날개 훈련”은 단지 텔레파시적인 의사소통을 가설로 할때에만 설명할 수 있는 것 같다. 물새 떼의 집단적인 움직임도 그 가설로서 설명될 수 있다. 

많은 사냥꾼들이 총을 휴대하지 않고 나가거나 잡겠다는 의도를 전혀 갖지 않고 나가면 빈번히 많은 야생동물들을 보고 아주 가까이에 접근하지만, 죽이겠다는 욕망이 있으면 동물들이 차분히 있지 못하고 의심스러워하며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관찰해왔다. 흥분이 사람에게서 동물에게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한 사냥꾼이 자신의 육체 및 마음의 흥분을 억눌렀을 때는, 자기가 이 교훈을 배우기 전보다 훨씬 더 쉽게 사냥감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가 획득한 호랑이가죽이 많은 것이 그의 말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좀더 나아가, 어떠한 정보가 정상적인 5감으로는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종종 하나의 명확한 감각으로서 작용해서―아프리카인들이 “chumfo”라 부르는―다가오는 위험에 대하여 경고를 주는 능력을 가진 많은 인디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고 말한다. 

특별히 이 주제와, 동물의 일반 생활상에 흥미를 가진 독자들은 “How Animals Talk”와 William J. Long이 저술한 다른 책들을 읽도록 강력히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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